다이어리에 적어놓고 잊고 있었던 참이었다. 인턴을 하는 NGO 대표님이 주신 공짜 티켓을 덥썩 받고, 그 다음날 냉큼 갔다. 환경영화제. 영화 소모임 카톡방에서 같이 보러갈 친구를 구했지만 어정쩡한 오후시간대여서인지 환경영화제가 인기가 없어서인지 (둘 다 인 것 같다) 별다른 반응이 없었다. 그래서 씩씩하게 나 홀로 데이트를 했다. 오전엔 영풍문고에 가서 일요일날 NGO에서 있을 간담회 통역과 그 다음날 세미나를 준비하기 위해 <도시에 대한 권리>를 샀고, 그보다 훨씬 흥미롭고 술술 잘 읽히는 <정글만리>를 정신없이 읽다가... 앉았다 섰다 배고픔을 참아가며 읽다가 '더 이상은 못 버티겠어!' 배고픔의 정점에서 결국 책을 내려놓고 점심을 먹으러갔다. 아쉽지만 가난한 대학생은 한권도 비싸고 세권 살 엄두는 도저히 안 난다.


스쿨푸드는 왜 장조림버터비빔밥을 8천원에 파는 걸까? 도대체 장조림버터비빔밥을 어떤 고급 재료로 만들길래 8천원이 되는 것일까... 배는 불렀지만 억울했다. 영풍문고에서 광화문 사거리를 지나 서울역사박물관 맞은편 씨네큐브로 가는 길이 참 좋았다. 도심 한 가운데지만 가로수 아래를 걸으니 적당한 그늘에 적당한 햇빛, 적당한 바람이 발걸음을 가볍게 했다.


<우리는 이길 필요가 없다 I Can Only Show You the Color>

조상대대로 부족의 땅을 지키며 살아왔던 페루의 아와훈족과 페루 정부의 갈등을 그린 다큐멘터리. 다국적 대기업이라는 거대자본을 등에 업은 정부는 시위하는 아와훈족을 향해 발포하고, 아와훈족은 경찰들을 마을로 인질로 납치해가 협상을 시도하지만 요구한 조건을 거절하자 이들을 잔인하게 죽인다. 지금 읽고 있는 <도시에 대한 권리>에서 점유와 사적소유를 분명히 구분하며 점유권과 사적소유권의 갈등에 대해 얘기하는데 결국 이 사례도 그러하다. 그 갈등 속에서 죽어나는 건 어쨌든 현장에서 맞붙는 페루 사람들이다. 아와훈족이든 경찰이든...


<사라지는 계곡 The Fading Valley>

이스라엘의 정착민과 팔레스타인 토착민들간의 '물'을 둘러싼 갈등. 갈등이라기 보다는 이스라엘의 일방적인 물에 대한 권리 박탈이다! 인구는 10,000 대 80,000. 가져가는 물은 80% 대 20%. 열악한 자연조건 속에서, 우물을 다 마르게 하고(팔레스타인 사람들은 몇 미터 이상은 더 깊게 우물을 파지 못하게 하는 법을 제정하는 등), 마을을 불법주거지로 지정해서 수도와 전기를 설치하지 못하게 하는 것은 사람들의 목숨을 손안에서 쥐락펴락하는 것이다. 바싹바싹 말라비틀어지는 농작물들을 보다못한 아들이 '전 떠날 거예요. 결혼을 하고 싶어도, 어느 여자가 이런 생활을 하고 싶겠어요?'라고 하자 '그래도 땅은 지켜야 한다. 내 마지막 소원이다'라고 하는 아버지. 우리나라에서 한창 도시화, 산업화가 될 시기를 배경으로 한 소설들이 저절로 떠오른다. 조상님으로부터 물려받아 간직하는 땅은 단지 교환가치를 지닌 상품으로서의 땅과는 차원이 다른 의미를 갖는다. 그리고 그러한 생각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모든 농민들의 바람이었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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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인턴이 끝나고 덕수궁 대한문 앞 세월호 희생자 추모 촛불집회에 다녀왔다. 주말에 가고 싶었지만, 주말에는 서울에 나올 일이 없다. 시청 앞 분향소는 한산했다. 노란 리본들을 보아도 얼마 전만큼 막 슬프지는 않았다. 그런데 촛불집회가 막상 시작되자, 주최측에서 틀어주는 동영상을 볼 수 밖에 없었고 결국 엉엉 울어버렸다. 페북에, 아이들이 배가 완전히 침몰하기 전에 찍은 동영상 링크가 올라왔었는데, 그걸 보면 너무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슬플까봐 피해다녔었다. 그런데 집회에 가서 보고야 말았다.


완전한 동영상은 아니었고 정지된 화면과 소리만 들려줬다. '선생님한테 카톡해봐~' '우리 진짜 죽는 거 아니야?ㅋㅋ' '구명조끼 꺼내 봐. OO이가 구명조끼가 없어.' '내 꺼 입어' '수학여행 왔는데 큰일났다' 하는 재잘거리는 목소리들 사이에 고3인 내동생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했고, 나도 모르게 그 아이들이 모두 내 동생 같다는 생각에 너무나 가슴이 아팠다. 그 와중에도 선생님을 걱정하고, 친구에게 구명조끼를 대신 내어주고, 엄마, 아빠, 동생을 보고싶어했던, 겨우 고2짜리 아이들...


사회 문제를 비판할 때 이렇게 감정을 이입한 적이 있었을까? 온전히 무고한 아이들이었기에, 온전히 어른들이 책임져야할 존재였기에, 시민들은 아이들의 죽음이 남기고 간 부채의식에서 영원히 자유롭지 못할 것이다. 엄마가 며칠 전 '얘를 키워봐야 진정한 어른이다'라고 한 것, 초등학교 3학년인데 아직도 이모 없이 30분을 못 넘기는 사촌동생에 대해 이모에게 '강아지를 길러봐. 자기가 온전히 책임져야 하는 존재가 생기면 의젓해지지 않겠어?'라고 조언한 것이 떠올랐다. 시민의식을 가장 통렬하게 지피는 것은, 결국 우리의 손에 소중한 생명이 고스란히 맡겨졌을 때의 그 책임감이 아닐까? 내 한몸 간수하는 것보다도, 너무나 연약하고 순수하여 지켜주고 싶고 지켜주어야만 하는 존재가 있을 때, 그걸 깨달았을 때 비로소 깨어있는 시민이 되는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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